지금이야 어떤지 모르겠다만
초등학교 때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걸 가지고 허구헌 날 말싸움하는 날이 많았다
아마 빨간마스크 얘기를 떠올린다면 이게 무슨 말인지 감이 올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 시절을 회고해 보자면
현 시점에서 봐도 나름 학술적이고 심오한 주제들이 인기를 얻고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초등학생 수준답게 어거지에 생떼가 난무하는 논쟁이었지만
하느님이 하늘에 있는가 없는가 같은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들이 토론 대상이 되기도 하고
투표권도 없으면서 당시 치뤄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이회창이 낫냐 노무현이 낫냐 같은
어른들 사이에서도 온갖 땡깡에 빼애액이 난무하는 주제를 가지고 병림픽을 열어 똑같이 빼애액을 시전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나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아마 1~2학년 때로 기억한다) 교실에서 가장 핫한 떡밥은 바로
숫자의 끝이 있냐 없냐 하는 문제였다.
숫자의 끝이래봤자 초딩들이 알고 있는 숫자라고는 실수도 정수도 아니고 자연수(랑 0) 정도밖에 없었으니
그 당시에 숫자의 끝이 있느냐는 건 자연스레 '가장 큰 수라는 것이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라는 말과 같았다.
우리 반에는 숫자의 끝이 있다고 주장하는 쪽이 더 많았고
나는 숫자의 끝이 없다고 말하는 소수파 중 한 명이었다
그 당시 교실 돌아가는 판을 말하자면, 숫자의 끝이 있다는 놈들은 쉬는 시간마다 우수한 머릿수빨로 숫자의 끝이 무한대라며 소수파에게 항상 시비를 터는 형국이었다.
나는 갖은 반박을 구상했는데, 그 중에서도 기억 나는 것 하나를 꼽자면 이런 반박이 있었다.
-네가 말하는 무한대에다 1을 더하면 그게 숫자의 끝보다 큰 게 아니냐?
캬 지금 생각해도 탁월한 것 같다.
그러나 그때 그 반박은 무한대에 숫자를 더할 수 없다는 터무니없는 말에 아주 쉽게 무너졌다.
지금 생각하니까 억울하네 ㅅㅂ놈들 더하기 빼기도 못하면 그게 숫자냐
그러던 어느 날 아동열람실에서 엔터테인먼트의 성지인 야후꾸러기를 하던 나는 문득 그 생각이 들었는지 야후에 무한대를 검색했다
그런데 거기에 무한대가 "무한히 커져가는 상태"라는 구절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다음 날 나는 득의양양하게 저 멍청한 무한대 신도들에게 일침을 날리려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나는 당당하게 너희들이 말하는 무한대는 수가 아니며, 어떠한 수가 끝없이 커지는 상태일 뿐이라고,
첨단을 달리는 나의 신지식을 뽐내주었다.
덧붙여 그런 거짓말을 믿는 너희들은 바보 멍청이에 돌머리(석두라고도 했던 것 같다)라고
맹꽁이 서당인가 어딘가에서 보고 배운 신식 욕까지 시전했다.
그러자 그 무리에 있는 한 아이가 울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 애의 이름이 아직도 기억난다. OOO초등학교 2학년 2반 박재희
22년째 매일 인생 모쏠 신기록을 찍고 있는 나에게 초딩 시절 유일하게 따뜻한 한 켠의 추억을 가져다준 여자애였다.
어디에서 구했던 것인지 학교 정문 앞에서 건네받은 반지 한가운데 빛나던
작은 보석의 자색 빛깔이 지금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 여자애도 무한이 숫자의 끝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 내가 내뱉었던 마지막 세 단어를 수습해보려고 했으나
정념이 이성을 지배하는 초등학교 교실에서 그런 것은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이어 다른 아이가 선생님께 이 사실을 일렀고, 나는 손을 들고 서 있게 되었다.
그 사건 이후 숫자의 끝이 없다는 파의 위세는 조금 더 강력해졌으나
그뿐이었고, 쉴대로 쉰 그 떡밥은 이내 사그라들었다.
어차피 문방구 앞에서 카드도 모으고 딱지도 모으고 쥐포도 구워먹어야 하고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던 초딩들에게
숫자 떡밥은 하고 많은 놀거리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바보 멍청이 돌머리라고 욕한 죄로 혼나고, 소중한 친구마저 잃어버린
패자도 승자도 없는 이 교실의 유일한 패배자가 되었다.
지금도 가끔 학교 운동장 구석에서 걔랑 같이 그네 타면서 나눈 말들의 편린이 마음속에 떠돈다.
내가 모쏠이 되고 ㅈ같은 삶에 대해 고민하고 쇼펜하우어에 꽂히고 철학과에 간 것은 어쩌면 예정되어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ㅄ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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